멍한 밤 (2022-08-13)

이번 감기는 평소보다 강했다.

열이 잔뜩 올라 뇌가 익어버리니
그토록 던져버리고 싶었던 번뇌가
안개로 사라졌다.

바라던 하루를 보내고
마침내 찾아온 감성의 밤
어리석게도 나는
가려진 번뇌를 그리워한다.

나는, 슬픔 속에서 생을 느끼는 인간.

즐거움은 불꽃으로 타올라 사라지지만
슬픔은 얼어붙은 가시가 되어 오래도록 남는다.

가슴 속에 토해내지 못한 눈물은
목구멍에서 울컥임이 되어
밖으로 분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열이 내려, 감성이 다시 얼굴을 보일 때,
막아놓은 눈물이 툭 터지며 퍼져 나갈 것이
두렵고 또 슬프다.

나는, 슬픔 속에서만 생을 느끼는 인간.

이 멍한 밤에,
나는 방향도 없이 방황하며,
메마른 슬픔을 슬퍼한다.


죽은 쥐 (2022-08-24)

무심한 발걸음을 이끌며
차가운 돌바닥을 거니는데
흠칫, 작은 쥐가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매끈하고 깨끗한 서울의 아래에서도
아직 너 같은 지저분한 애들이 있구나
그러고 지나가려는데

쥐가 흘린 피웅덩이를 본 나는
그 속에서 진한 생명의 흔적을 느꼈다.

너는 어떤 삶의 끝에서야
그렇게 맥없이 죽어있느냐
그렇게 잔인한 진홍을 흘리느냐

나는 왜 더러운 쥐를 보고
가슴에 울컥함을 느낄까.

돌아다본 내 가슴에
이제는 허무함이 깃들어 있는데
작은 쥐의 피 웅덩이에서
나는 진한 삶의 흔적을 보았다.

이 마음이 부끄러워
나는 속죄의 심정을 흘렸다.


여름의 끝 [2022-08-30]

하늘이 여름의 끝을 비로 장식했다.

더위의 끝에 고대하던 선선함이 느껴지는데
알 수 없는 회한이 다가오는 것은
여름내 몸을 던지며 내달렸음에도
고작 이까지 밖에 오지 못한 까닭일까

아직 갈길이 멀어
짜증나는 여름을 붙잡고 싶지만
이제 기다리는 것은
마음에 태풍을 내리쬐는 가을밤

여름 태양 아래서도 마음이 따뜻하진 않았다
봄이던 여름이던 가을이던 겨울이던
아직 고지를 넘지 못한 미생에게는
고개를 들 자격 없는 계절들

더 멀리 날고 싶어서
길게 도움닫기를 뛴다지만
실은 바라는 것은
날개가 꺽여 추락하는 새

밑바닥에서 고통스러워 하는 새의 표정이
후련한 까닭은 무엇인가
희망보다 편안한 절망과
꿈보다 아늑한 체념

여름의 마지막날에 비가 내린다.
희망의 족쇄를 벗고 싶은 나는
절망을 기대하며 여름에 이별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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